한국, 대외 자산 절반이 예비 목적의 외환보유액…
"위기 때 언제든지 사용" 은행권 도덕적 해이 불러
한국은 10여년 전 외환위기를 경험했고 다시는 같은 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해 왔다. 외환보유액도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작년 말과 올해 초에 걸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국내 외환시장은 폭풍 속의 돛단배처럼 휘청거렸다. 한국은 왜 다시 외환위기의 폭풍에 휩싸이고 말았을까?
금융위기 이전만 해도 근 7년 동안 원화 환율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2007년 10월 이후 상황은 돌변했다. 그 이후 원화는 미국 달러에 비교한 절하율이 가장 높았고, 변동성도 가장 심했던 통화 중 하나로 분류된다. 금융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작년 11월에는 국내 외환시장 거래량이 평소의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는 '유동성 함몰(liquidity black hole)' 현상까지 나타났다.
물론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달러 유동성을 흡수하는 바람에 다른 많은 나라의 통화들 역시 달러에 대해 가치 절하를 경험했다. 뉴질랜드, 호주, 스웨덴 통화도 최대 45% 이상의 절하율을 보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한국에서는 국내 은행들의 외화 유동성 위기 가능성이 제기된 반면, 호주나 뉴질랜드에서는 금융기관들의 외화 유동성 위기가 논외였다는 점이다.
■세계 6위의 외환보유액, 은행권 외화 부채 갚는 데 쓰여
7월 말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375억달러로, 세계 6위에 랭크돼 있다. GDP(국내총생산)와 비교한 상대적인 규모로는 GDP 대비 약 20%에 달해 세계 8위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GDP 대비 외환보유액이 많은 나라 1~4위가 싱가포르, 홍콩, 대만 및 중국인데, 모두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서 큰 소동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외환보유액을 지금보다 더 늘려 외환시장의 안정을 담보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들 국가는 자유변동 환율제도가 아닌, 고정 내지는 관리변동 환율제도를 갖고 있어 한국과 단순 비교 자체가 힘들다. 자유변동 환율제도를 실시할 경우, 이론상으로는 모든 대내외 불균형이 시장에서의 환율 변동으로 조정되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외환을 많이 보유할 필요가 없다. 반면 고정환율 혹은 관리변동 환율은 자잘한 시장의 불균형 압력을 중앙은행이 시장 개입을 통해 조정하기 때문에 외환보유액이 넉넉해야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자유변동 환율제도를 표방하면서도 외환보유액을 많이 가진 나라에 낀다. 자유변동 환율제도를 갖고 있으면서 외환보유액을 GDP의 20% 이상 보유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23%)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에 의해 자유변동 환율제도를 채택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는 이상, 외환보유액을 많이 보유할 때의 효용성과 문제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환율의 중장기적 움직임은 현재와 미래의 경제 여건을 반영한다. 위 그래픽에서처럼 2005년 중반부터 2007년 말까지 한국의 소득 교역조건은 약 15% 개선되었다(소득 교역조건이란 수출 금액을 수입 단가로 나눈 수치이다. 다시 말해 1단위 수출량으로 수입할 수 있는 수입량을 나타내는 것으로, 교역조건이 개선되면 그만큼 외화를 많이 벌어들인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미국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도 약 12% 절상됐다. 그러나 2008년 이후 교역조건이 급속하게 악화되자 원화 가치도 하락(환율 상승)했다. 돌이켜 보면 원화 가치 하락 덕분에 한국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다른 국가에 비해 경제 위축의 폭을 완화시킬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자유변동 환율제가 갖는 장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원화 가치가 경제 펀더멘털에 비해서도 지나치게 하락했다는 점이다. 2007년 10월과 2009년 2월 사이 소득 교역조건은 11% 악화된 반면 미국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는 66% 폭락했다. 특히 한국 외환시장의 취약성과 은행권의 부실한 외화부채 관리 능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외화 자금시장의 사정을 들여다 보면 무엇이 문제였는지가 금세 파악된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2008년 말 국제 자본은 극도로 위험 회피적 성향을 띠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신흥 경제 가운데 가장 높은 순(純) 대외 채무액을 부담하고 있었고,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 외채 비중도 가장 높았다. 대외 채무 중 많은 부분은 외국계 은행들이 본점이나 국제 금융시장에서 들여온 차입금이었다. 따라서 외국계 은행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경우 신흥 경제국 가운데 한국이 입는 타격이 가장 클 것임은 자명했다. 이것이 국내 외화 자금시장을 얼어붙게 했고, 외화 조달 비용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해 달러 가뭄을 더 악화시켰다.
2008년 말 당시 550억달러가량 방출된 외환보유액의 대부분은 은행들의 단기 차입금을 상환하는 데 사용됐다. 외환보유액으로 환율 급등을 막는 데 손 쓸 겨를은 없었고, 대신 은행권이 소홀하게 관리한 외화 유동 부채를 중앙은행이 해결해 준 셈이다.
■무시 못할 외환보유액 유지 비용
외환보유액의 확대는 직접적인 비용과 간접적인 비용을 유발한다. 직접적인 비용에는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늘리기 위해 채권(외평채)을 발행할 때 조달금리는 높은 반면, 외환보유액의 달러를 운용할 때는 주로 제로금리에 가까운 미국 국채를 사게 됨으로써 생기는 이자 손실이 포함된다. 외환보유액의 과다 보유는 통화정책 측면에서도 부담을 안겨준다. 정부가 달러를 사들이는 바람에 시중에 원화 유동성이 늘어날 경우 물가 안정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국은행이 통화안정증권의 매각 등을 통해 시중 유동성을 흡수해야 한다.
그러나 간접적인 비용도 있다. 도덕적 해이가 그것이다. 중앙은행이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보유할 경우 민간은 이것을 위기 시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예비적 유동 자산으로 인식할 수 있다. 특히 은행들은 여기에 기대 단기 외채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지난 8년간 대외 자산에서 외환보유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54%에 이른다. 자유변동 환율제도를 채택한 국가 중에 제일 높다. 일본의 경우 18% 정도다. 자유변동 환율제도 하에서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민간이 아닌 정부가 대외 자산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은행권의 외화 유동성 공급원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은행들의 외화 부채에 대한 문제의식이 해이해질 소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와 경제 규모가 비슷한 나라, 혹은 경제 규모는 우리보다 작지만 전 세계 대미 달러 외환시장에서 자국 통화의 거래 비중이 높은 나라들과 비교해 보자. 호주와 스위스, 스웨덴, 뉴질랜드의 외환보유액은 적게는 뉴질랜드의 88억달러에서 많게는 스위스의 661억달러 수준이다.
그런데 이들 나라의 대외 자산에서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스위스의 경우 3%, 뉴질랜드의 경우 14% 정도에 불과하다. 대신 대외 자산을 민간이 보유하는 비중이 높다. 이들 국가의 대외자산 가운데 주식·채권·파생상품 같은 포트폴리오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37~44%에 달한다. 한국의 경우 포트폴리오 대외 자산의 비중은 13%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사실이 평소 외환시장의 유동성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통화 거래의 목적에는 예비적 목적과 거래적 목적, 투기적 목적이 있다.
한국처럼 대외 자산의 절반 이상을 예비적 목적의 외환보유액으로 보유한다면, 거래적 목적이나 투기적 목적의 유동성 흐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국제 간 금리 차이, 국제 자산 가격에 대한 기대수익률 변화, 위험 선호도 변화와 같은 국제 경제 변수들이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외환시장에 반영되는 정도가 약해지게 된다. 호주, 스위스, 스웨덴, 뉴질랜드 외환시장의 외화 유동성이 한국보다 높은 이유는 거래적·투기적 목적의 외화자산 거래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물론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보유함으로써 1997년 같은 외환위기 상황을 방지할 수만 있다면 이런 비용은 감내할 만하다. 그러나 위기란 경제의 기초여건이 악화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외화부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외환보유액만 확충한다고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용과 효용성을 동시에 감안해야
호주는 한국의 6분의 1도 안 되는 330억달러 남짓한 외환보유액을 가지고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동을 잘 버텼다. 물론 호주도 호주달러 가치가 폭락하는 사태를 겪긴 했다. 호주는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 때문에 대표적인 엔 캐리 트레이드(저금리의 엔화를 일본에서 빌려 해외의 위험자산에 투자하는 것)의 대상 통화였다. 이번 위기 때 유동성 회수가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호주달러 가치가 폭락했다.
그러나 호주가 한국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한국처럼 값은 불문하고 달러를 구할 수 없는 심각한 외화 유동성 문제를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환시장 거래량이 급감한 한국과는 정반대로, 호주는 오히려 외환 거래량이 늘어났다. 호주 금융기관들이 해외에 갖고 있던 달러 자산을 매각해 이를 국내 외환시장에서 호주달러로 바꾸느라 달러를 매도한 반면, 호주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호주달러로 투자했던 것을 달러로 바꿔 나가느라 달러를 매입했다. 매수와 매도 양쪽 다 늘어나니 외환시장 거래량이 늘어난 것이다.
또한 호주는 일찌감치 지난 10여년에 걸쳐 호주달러의 국제적 태환성 확보에 공을 들여 꽤 성공적으로 국제 통화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예를 들어 호주의 대외 부채 중 40%가량은 해외에서 발행된 호주달러 표시 부채였다. 자산과 부채의 통화 불일치라는 '원죄(原罪)'를 어느 정도 해결한 것이다. 이 역시 호주 금융기관들이 심각한 외환유동성 위기를 겪지 않게 하는 데 일조했다.
이런 여러 상황을 종합 검토해 보면, 제2의 외환위기에 대비해 3000억달러 이상의 외환보유액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은 득과 실을 따지지 않은 평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외환보유액이 많을수록 대외 신인도 제고에 유리하다는 주장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액 확충 행위를, 수출 가격 경쟁력 제고를 위한 '시장 개입'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그만큼 '대외 의존도가 높아 취약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환보유액 확충 문제는 비용과 보유 목적의 효용성을 감안해서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한다.
보다 바람직한 방법은 우리가 제조업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듯, 대외 자산의 운용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전략적 시각을 갖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선 금융과 위험관리 능력의 고도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또한 자산-부채의 통화 불일치라는 만성적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도록, 원화 국제화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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