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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 극복기-3] 우리 딸 신종플루 이기고

dunia 2009. 11. 10. 11:59

신종플루 극복기-3] 우리 딸 신종플루 이기고…

 
2009년 10월 29일 서울 동작구 보건소 직원들이 구내 약국에 타미플루를 공급하고 있다. 처방전이 있으면 일반약국에서 타미플루를 사 먹을 수 있다. / 조선DB

신종 플루에 대한 불안감이 높다. 연예인 등 유명인 자녀의 갑작스런 사망소식마저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당황해 하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빨리 치료하면 안전하다’고 안심시키지만 모두가 정말로 안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치사율이 일반 독감보다 훨씬 낮은 신종 플루. 이 신종 플루를 직접 앓았거나, 가족들을 통해 함께 극복한 경험이 독자들의 불안감을 더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편집자

비록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신문 방송에 나오는 일들은 늘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도, 강도, 홍수 피해 기타 등등은 모두 내 주변을 비켜갔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생인 내 딸이 40도에 육박하는 고열과 기침으로 사경을 헤맬 때도 나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늘 그러하듯, 저러다 푹 땀 흘리고 자면 낫겠지 하고 생각하며 출근을 했고 일을 했고, 일을 마치고 사람들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아내가 전화를 했다. 애가 많이 이상한데 당신 어디냐고. 늘 그러했듯, 술 먹고 있다고 했더니 나더러 아빠 맞냐고 한다.

평소에 감기가 잦은 아이라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미 신문에 보도되는 큰 사건 사고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다 보니 일체의 모든 일들은 나 자신과 무관하다고 치부하며 살아온 터였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다른 때라면 해열제 먹이고 땡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날 밤을 보냈고, 다음날도 별다른 의식 없이 출근했다. 아이는 소파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그날 저녁에 아내가 또 전화를 했다. “알고 지내는 의사한테 얘기해뒀으니까, 내일 출근 늦추고 의사한테 가서 타미플루를 받아오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의 결정은 참으로 옳았다. 나는 “왜 호들갑이냐”며 대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무조건, 무조건 타미플루를 받아오라는 것이다. 아이 외할머니가 와서 아이를 돌보는 동안 나는 의사 집으로 갔다. 의사가 말했다. “내 딸이 열이 났었다. 무조건 타미플루를 먹였다. 확진을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는가. 여기 타미플루 있으니까, 가서 딸 먹여라. 무-조-건.” 아이 상태를 진단하고 내린 처방이 아니라 찜찜했지만, 다름 아닌 의사가 그랬다니까 나는 군말 않고 약을 받아와 집에 가져다주고 회사로 나갔다. 아이한테는 “힘 내”라고 한마디 해줬다. 회사에서 인터넷을 뒤져봤다. 소아에 대한 타미플루 처방이 부작용에 대해서. ‘보고된 바 없음’이다.

그리고 일산병원 소아과에 전화를 걸었다. XXX 선생님 환자 보호잔데, 아이 상태가 이러하니 타미플루를 먹여도 되냐고 물어달라고 간호사한테 부탁했다. 한참 뒤에 연락이 왔다. “먹여야 한다”가 첫 대답이었다. “그런데 정식으로 처방받은 게 아니다. 그래도 먹이나.”

대답은 “그러면 일단 의사가 진단을 해야 하니, 오늘은 환자가 흘러넘치고, 내일 병원으로 데리고 오라”였다. 일산병원은 신종플루 거점병원이다.

이미 발열과 기침 증세가 나타난 지 이틀이 된 시점이었다. 아내에게 전화해서 그대로 의사 말을 전달했다. 아내는 참지 않았다. 무책임하게 남 말을 그대로 옮기는 사람이 무슨 아빠인가부터 여러 가지 욕을 들어먹었다. 아이는 여전히 소파에 쓰러져 있다고 했다. 에너지가 흘러 넘쳐서 1초도 쉬지 않고 재잘대고 춤을 춰대던 명랑한 소녀가. 내가 말했다. “감기약 먹여서 호전되지 않으면 신종플루일 터이니 그때 검사를 받자”고. 아내가 통고했다. “무책임한 아빠 덕에 아이 큰일 치르게 생겼으니, 내가 동네병원이라도 가겠다.” 전화가 끊겼다.

그날 저녁 늦게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병원에 가서 신종플루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아내 말에 따르면 그곳 의사는 겉으로 볼 때는 신종플루는 아닌 것 같으니, 검사 결과를 보자고 했다. 검사는 목 안쪽에서 조직을 체취하는 간이검사였다. 그리고 해열제가 포함된 감기약을 처방했다. 의사라는 직업군은 숙명적으로 신중해야 한다. 아내는 진료비를 결제한 뒤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타미플루를 아이에게 먹였다. 의사 말을 무시해버리고. 아내 표현을 빌자면, 아이는 “1시간도 안 돼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게 10월 28일 저녁, 극심한 고열과 기침과 탈수 증세로 고생한 지 이틀 만에 처음으로 아이가 웃은 것이다.

통화를 하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타미플루가 통했으니, 이건 진짜 신종플루구나. 내 앞에 있는 모니터에는 어느 연령층의 몇 명이 사망했다는 속보가 떠 있었다. 남 일로 치부하던 일들이 갑자기 나, 그리고 내 가족에게 벌어진 것이다. 그날 집에 왔을 때 딸은 소파가 아니라 자기 방에서 자고 있었다. 침대 아래 방바닥에는 아내가 자고 있었고. 머리를 만져보니 열은 없었다. 아니, 열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차가웠다. 저체온증. 허겁지겁 아무 대책 없이 복용한 타미플루의 부작용이 아니었을까. 깨어난 아내는 아이 체온이 35.5도라고 했다. 그날 오후까지 39도였던 체온이 수직으로 추락해버린 것이다. 그날 밤 아내는 체온을 재느라 한 시간마다 깨어나 아침을 맞았다.

신종플루 확진 여부는 사흘이면 충분했지만, 환자가 하도 밀려서 닷새가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주말이 끼여 있으니 더 오래 걸릴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아침 아이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공부 걱정 말고 아이 푹 쉬게 한 다음에 보내라고 했다. 아이는 겉으로는 완쾌한 듯했다. 기력은 없었지만 웃고, 인터넷 뒤지고 노래하고 책을 읽고 그랬다.

아내는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러자 놀랍게도 신종플루 의사증세 및 확진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너도 나도 모두다. 내가 사는 일산에 신종플루라는 유령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학부형 혹은 보호자 혹은 본인의 말은 거의 동일했다. “어떻게 해서든 타미플루를 무조건 먹였다, 그래서 나았다.”

타미플루가 무슨 약인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그 부작용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약은 마치 종교의 구세주처럼 작용하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이런 막무가내 현상을 우려하고 있지만, 방법이 없다. 벼락맞을 확률이 0.000001%일지라도, 본인이 벼락을 맞게 된다면 이건 확률이 100%가 아닌가. 그 100%의 확률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총동원해 이 약을 구해 남용 혹은 오용하는 중이다. 그리고 대개 증세가 싹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신중론자들의 입지가 그리 확고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1월 2일 월요일 아침, 동네 병원에 연락을 하니 신종플루 양성 확진이 나왔다고 했다. 회사에 출근해 팩스로 결과지를 받았다. 간단했다. ‘신종플루 반응:양성’. 잠시 고민했다. 신종플루 소아 환자와 한 지붕 아래에서 밥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호흡했다. 하지만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자, 그렇다면 이를 뭉개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고지된 대로 직장에 보고를 하고 공가(公暇)를 내고 집으로 스스로를 격리시킬 것인가.

일단 상사에게 보고를 했다. “고민할 것 없이 곧장 퇴근할 것.” 결과지를 제출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주위에서 그랬다. “남들이 불안해하니 더 앉아 있지 말고 속히 귀가하시라.”

점심 무렵에 주섬주섬 짐을 싸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마치 지금 나가면 회사 못 돌아오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교보서점에 가서 한참을 배회하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대낮의 서울~일산 가로 풍경이었다.

신종플루의 잠복기는 닷새라고 한다. 월요일 시점에서 시작해 닷새 이상 플루 증세가 나타나지 않으면 일단 신종플루가 거쳐갔거나 아니면 감염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집에 있는 동안 나는 너무나도 착한 아빠가 되어 아이를 돌봤다. 학교는 물론 학원, 친구만나기, 외출하기 등 모든 일상생활이 금지됐으니, 아이는 평소에 잔소리와 신경질로 점철돼 있는 아빠와의 대화를 거북해했다.

아이 상태는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신종플루를 겪은 아이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겪게 될지도 모를 어려움이 더 조심스러웠다. 아내도 나도 군중이 모인 곳으로 외출을 삼갔다. 친지들도 상황을 잘 아는지라 전화로 안부를 물었을 뿐이다. 지루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확진 통보 이후 닷새째인 지난 7일까지 아내와 나에게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그날 학교에 나갔다. 좀이 쑤시던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와 그날 이야기를 하느라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그날 병원에 가서 내 상태를 문진 받고 소견서를 받았다. ‘잠복기간 동안 증세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직장에 출근해도 무방함.’ 그리하여 지난 8일 처음으로 가족 모두 외출해 할아버지 할머니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9일 월요일, 소견서를 들고서 일주일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다행히 책상은 그대로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종플루와 관련된 경험을 했고 그 결론도 비슷할 것이다. 어린 딸이 앓는 모습을 지켜본 아빠로서, 이 짧고 진한 경험의 교훈을 들어보자면 이렇다.

첫째,둘째, 셋째 신속대응 신속대응 신속대응이다. 의료계 사람들의 판단을 존중한다. 하지만 지금 신중한 판단을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하다. 아니, ‘너무’라는 단어는 이 상황의 체감온도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전쟁이다, 이건.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일반 병원 진단으로 곧장 타미플루 조제를 허용한 것은 백번천번 잘한 결정이었다. 고지식하고 바보같이(이 표현이 거슬리다 해도 용서하기 바란다) 의사 처방을 기다렸다면 우리 집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끔찍하고 또 끔찍하다. 판단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긴 아내의 결정이 정말 고맙다.

네째, 신속대응 이후에는 안심하자. 집에 있는 초기 며칠 동안 조바심을 내며 딸을 지켜봤지만 아이는 급속도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손을 수시로 씻고 집안을 환기시키고, 고단백질 음식을 먹고 하는 일상적인 건강유지 수칙을 지키면 그 이상의 과도한 조바심은 필요없었다.

마지막, 남을 위해서라도 제시된 격리 기간은 지켜야 할 것 같다. 본인 스스로 당장 이상 없다고 판단했을지라도, 플루 바이러스까지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의학적으로 확인된 잠복기간은 격리돼야 마땅하다.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것이지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니까.

남들은 언론이 호들갑을 떤다고 얘기하지만, 그 호들갑을 떤 덕택에 신종플루에 대한 안이한 정책들이 빠르게 수정됐다. 일산 학부형들은 이렇게 말했다. “수업일수가 중요한가, 아이들 목숨이 중요한가. 왜 휴교를 못하게 하나.” 앞에 말했듯, 지금은 전시(戰時)다. 이건 호들갑이 아니다. 이 전쟁에서 인류가 압승을 거두기를 소망한다.